“왜 나는 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끌리는 걸까?”
우리는 때때로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 반복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떠나야 마땅하지만, 감정은 그 사람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이건 건강하지 않아”라는 경고음을 울리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그래도 이번엔 다를지도 몰라”라는 희망을 품는다.
이런 심리적 딜레마의 중심엔 바로 **감정 중독(emotional addic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치 약물 중독처럼, 강렬한 감정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며 그 자극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의존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1. 감정도 중독이 될 수 있을까?
중독은 단순히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뇌는 도파민, 아드레날린, 코르티솔 같은 신경전달물질에 반응하며 특정 감정 상태를 강화하거나 회피하게 만든다. 특히 반복되는 긴장, 불안, 기대, 좌절, 그리고 간헐적인 보상이 반복되는 관계 속에서 우리의 뇌는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강렬한 감정의 파도에 중독된다.
상처 주는 사람은 종종 애정과 무관심을 번갈아 가며 보낸다. 이 불균형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의 관심을 얻기 위해 애쓰게 되고, 가끔 받는 따뜻한 말 한마디나 사소한 배려에 과도하게 감동하게 된다. 이게 바로 **“간헐적 강화(intermittent reinforcement)”**다. 동물 실험에서도 간헐적인 보상이 가장 중독성을 유발한다는 결과가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정하지 않은 애정은 더 강한 집착을 유발한다.
2. 상처조차 친숙한 감정일 수 있다.
“그 사람과 있으면 아프고 힘들지만, 왠지 익숙하다.”
상처 주는 사람에게 끌리는 심리는 종종 어린 시절의 애착 경험과 맞닿아 있다. 어린 시절 중요한 양육자(주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안정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조건적이거나 예측 불가능한 애정을 경험한 경우,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관계 패턴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려 한다.
이른바 **재연 욕구(repetition compulsion)**다. 과거의 상처를 반복함으로써 그 기억을 다시 쓰고 싶어 하는 심리적 시도다. 하지만 결과는 대개 다르지 않다. 상처는 반복되고, 자존감은 점점 깎인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친숙한 패턴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안하고 두려워, 그 관계를 계속 붙잡게 된다.
3. "왜 떠나지 못할까?" - 자기 가치감의 문제
감정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흔히 “내가 더 잘하면 될 거야”, **“나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이는 자신을 낮추는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하려는 전략이다. 즉,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고, 상대에게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핵심 이유 중 하나는 낮은 자기 가치감이다. 자신이 존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약할수록, 상대의 나쁜 대우도 “내가 감수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쁜 대우를 받아도 “나니까 그렇지”라는 식의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못한 채 상처 속에 머물게 된다.
4. 감정 중독의 전형적인 특징들
다음과 같은 특징이 반복된다면, 감정 중독 상태를 의심해 볼 수 있다.
관계가 고통스럽지만 떠날 수 없다.
그 사람이 내가 필요할 때만 내가 존재하는 것 같다.
상대가 나를 무시하거나 냉대해도 핑계를 댄다.
가끔 보여주는 다정함에 모든 상처를 잊는다.
상대의 기분에 따라 내 하루가 좌우된다.
떠난 뒤에도 계속 그 사람 생각이 난다.
이런 반복 패턴은 단순한 ‘사랑’이나 ‘정’ 때문이 아니다. 이는 뇌가 중독된 감정 패턴을 다시 경험하려는 심리적 작용이다.
5. 치유의 시작: 감정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
감정 중독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인정’**이다. 지금 내가 건강하지 않은 관계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다음의 실천들이 필요하다:
자신의 감정 관찰하기
하루에 몇 번이라도 내 감정 상태를 점검해 보자.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외부 자극에 의해 자동으로 올라오는 것인지, 혹은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감정인지를 살펴보자.
감정 일기 쓰기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기록해 보자. 감정 중독은 무의식적인 패턴이므로 ‘의식화’가 필요하다.
경계 세우기 연습
상대의 행동이 나를 반복적으로 아프게 한다면, 그 경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선을 그어야 한다. 이는 나를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다.
심리적 지지망 만들기
친구, 상담사, 커뮤니티 등 감정을 털어놓고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 혼자서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자기 가치감 회복하기
"나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되찾는 작업이 중요하다. 작은 성공 경험을 쌓고, 스스로를 격려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6. 감정 중독은 약함이 아닌 ‘상처’다
감정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왜 그런 사람에게 집착하냐?”는 말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그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벗어나기가 너무나 두렵고, 외롭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감정 중독은 약함이나 미련함의 문제가 아니라, 치유되지 않은 상처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돌봄과 인식을 통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
결국, 사랑은 아픈 게 아니라 따뜻한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많은 감정은 사실 익숙한 상처였는지도 모른다. 진짜 사랑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나를 평온하게 만든다. 감정 중독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돌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꾸만 뭔가 놓치는 느낌, FOMO의 심리적 실체 (0) | 2025.04.01 |
---|---|
우울함과 외로움은 어떻게 다를까? (0) | 2025.03.31 |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이유: 신뢰 트라우마의 심리 (0) | 2025.03.29 |
타인의 시선이 너무 신경 쓰일 때: 사회불안의 정체 (0) | 2025.03.28 |
혼자가 편하지만 외롭다: 고립감과 독립성의 경계 (0) | 2025.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