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라우마의 순환에 대한 심리학적 고찰
“나는 왜 또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왜 항상 같은 상황에서 무너질까?”, “이번엔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또 상처받았다.”
이런 말들을 우리는 종종 듣거나 스스로 되뇌곤 한다. 상처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되살아난다. 낫지 않은 채로 남겨진 감정의 찌꺼기들이 삶 속에서 비슷한 상처를 반복적으로 불러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트라우마의 순환(Trauma Reenactment)’ 혹은 **‘상처의 재연’**이라 부른다.
1.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트라우마는 단지 큰 사고나 재난을 겪은 사람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깊고 반복적인 감정적 상처는 충분히 심리적 외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반복적으로 무시당했던 경험
안전하지 않은 가족 환경에서 자란 기억
지속적인 비난과 비판을 받아온 관계
이러한 경험은 의식적으로는 잊고 살아가더라도, 무의식 속 깊은 곳에 남아 우리 삶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 트라우마의 본질은 단지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지속해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게 만드는 감정적 경험의 구조다.
2. 왜 우리는 같은 상처를 반복할까?
트라우마의 순환은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개념이 바로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다.
프로이트는 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과거의 상황을 다시 만들어냄으로써 그것을 통제하거나 극복하려는 무의식적인 욕구를 가진다.”
쉽게 말해, 과거에 상처받았던 관계나 상황을 의도치 않게 반복하면서, 이번엔 그것을 다르게 끝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무의식적인 시도가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는 데 있다. 과거의 감정은 여전히 아직 소화되지 않았고, 방아쇠(trigger)는 언제든 작동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서적으로 차가운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성장 후에도 냉담한 연인에게 끌리기 쉽다.
자존감이 낮아지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이후에도 자신을 깎아내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 모든 것은 무의식이 익숙한 패턴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안전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관계, 새로운 환경은 우리에게 오히려 더 큰 불안과 낯섦을 불러온다.
3. 트라우마는 몸과 감정에 저장된다
신경과학자 베셀 반 되어 코르크는 그의 저서 『몸은 기억한다(The Body Keeps the Score)』에서, 트라우마는 단지 ‘기억’이 아니라 신체적인 감각과 정서 반응으로 저장된다고 말한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비슷한 냄새, 소리, 말투, 분위기만으로도 과거의 감정을 현재의 감정처럼 다시 느낄 수 있다. 이때 뇌는 그 경험이 과거가 아니라, 지금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반응한다. 이에 따라 감정은 과장되거나, 혹은 무감각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예컨대,
누군가의 무표정한 얼굴만으로도 거절당한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
약간의 지적에도 심하게 불안하거나 자책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괜히 초조하고 불안하다.
이런 반응은 모두 과거의 감정 경험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4. 트라우마의 순환을 끊는 첫걸음: 자각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무의식적인 반복 패턴을 ‘의식화’하는 것이다.
“나는 왜 이런 상황에서 과도하게 불안할까?”, “왜 나는 비슷한 사람들에게 끌릴까?”, “왜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지나치게 상처받을까?”
이러한 질문은 **자기 인식(self-awareness)**의 시작이 된다.
우리의 뇌는 익숙한 것을 선택하지만, 익숙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자신이 반복적으로 빠지는 패턴이 있다면, 그것을 외부의 문제로만 보기보다 내 안의 감정적 기억과 상처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5. 치유의 핵심: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고’, ‘재해석’하는 것
트라우마는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억눌렀을 때 더욱 깊어진다. 그러므로 치유의 핵심은 감정을 다시 안전한 환경 속에서 느끼고, 표현하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 효과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심리상담 또는 치료: 전문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안전하게 탐색하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저널 쓰기: 감정을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무의식적인 감정 패턴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신체 기반 치료: 요가, 명상, EMDR, somatic therapy 등 몸에 저장된 긴장을 풀어내는 방식도 효과적이다.
6. 트라우마는 약점이 아니라 회복의 기회다
많은 사람이 트라우마를 ‘부끄러운 과거’, ‘잊고 싶은 상처’로 치부하지만, 오히려 그 상처는 내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반복의 굴레를 끊고,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마무리하며
마음의 상처는 그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상처에는 반복되는 무의식적 신호가 있고, 그 신호는 이제는 마주 보고 치유하자는 내면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같은 상처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다.
그 상처를 이해하고, 느끼고, 돌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침내 다른 선택의 문을 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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